야행(夜行)(1977) - 1970년대 서울, 관계의 종말
※ 글 내용 중에 영화 <야행(夜行)(1977)>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58년 <공처가 A Henpecked Husband(1958)>로 데뷔한 후, <저 하늘에도 슬픔이 Sorrow Even Up in Heaven(1965)><갯마을 The Seaside Village(1965)><도시로 간 처녀 The Maiden Who Went to the City(1981)><만추(晩秋) Late Autumn(1982)><허튼소리 Jung-kwang's Nonsense(1986)> 등 100편이 넘는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 감독의 1977년작 <야행(夜行) Voyage de Nuit(1977)>은 김승옥 작가가 1965년 발표한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을 각색한 로맨스 드라마입니다.
주연 윤정희 배우(1944~2023)는 데뷔작인 강대진 감독(1935~1987)의 <청춘극장 Sorrowful Youth(1966)>에서 신성일 배우(1937~2018)와 첫 호흡을 맞춘 후 1992년 박철수 감독(1948~2013)의 <눈꽃 Flower in Snow(1992)>까지 총 99편에 함께 출연했는데요. <야행(1977)>에는 두 배우와 함께 주증녀(1926~1980), 최희영, 최길호(1936~2007), 이일웅(1942~2022), 이자영, 주현, 김홍지, 정소녀, 이영호, 양일민 배우 등이 출연했습니다.
1977년 4월 23일, 을지로에 있었던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야행(1977)>은 제작 완성 후 3년 간 창고 신세를 지다 뒤늦게 개봉, 서울 관객수 135,047명을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개봉 당시 53군데나 가위질을 당해 온전한 모습으로 개봉하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 <야행(1977)>은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복원된 영상이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공식 채널인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서 공개 중이니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링크).
어떤 내용이길래
은행원 이현주(윤정희)는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으로 만났다가 베트남전에 참전해 세상을 떠난 차영회(주현)를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은행에서 함께 근무하는 박 대리(신성일)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다만 근무 시간 중에는 철저히 직장 동료로 지내기 때문에 은행에서는 아무도 그들의 관계를 알지 못합니다.
현주는 박 대리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이른바 사실혼 관계인 것에 늘 결핍을 느끼지만, 박 대리는 현주의 고민은 외면한 채 순간순간을 넉살 좋게 넘기려 드는 어중간한 태도를 견지합니다. 그런 박 대리와의 관계에 지친 현주는 집 밖으로 나돌며 방황하고, 휴가 기간 중 고향을 찾아 차영회와의 추억을 곱씹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현주에게서 권태의 기운을 느낀 박 대리는 마지못해 현주에게 결혼하자고 말하고, 현주의 고향으로 인사를 가기 위해 기차에 함께 올라탑니다.
파격적인 화법으로 말을 거는 수작(秀作)
19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세 이름, 김수용 감독과 윤정희, 신성일 배우의 문제적 영화 <야행(1977)>은 당시 서울을 배경으로 결혼이라는 제도 가장자리를 맴돌며 권태에 빠진 이현주를 중심으로 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파격적인 영화 화법으로 전개합니다.
서울이 아닌 고향에서는 첫사랑의 죽음으로 인해 동네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는 존재이면서, 도시인 서울에 있는 은행에 다니는 직장인으로서 현주는 동료의 결혼을 부러워하면서도 박 대리와의 남모를 관계에 지쳐가는데요. 그런 현주가 택한 일탈은 첫사랑이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을 찾아가 괜스레 스타킹을 추스르며 군인의 눈길을 의도적으로 받는다던지, 밤거리를 하릴없이 쏘다니다 뭇남성들의 관심이 쏟아질라치면 이를 내쳐버리는 등의 행동을 반복합니다.
1970년대 안락한 삶의 상징이던 서울 시내 아파트에서 버젓한 직장인 박 대리와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도 '결혼'이라는 정식의 절차를 밟지 못한 자신의 상황에 불만족스럽던 현주는 결국 박 대리에게서 정식 청혼을 받지만, '휴가는 끝났다'는 짤막한 메모 하나를 남긴 채 박 대리와 함께 탔던 기차에서 내리며 이를 거부합니다.
그런 현주의 마지막 선택은 안락함을 추구하는 듯했던 현주가 결국 사회적 제도와 속박을 발로 내쳤다는 파격적인 행보에 대한 알림인 듯했습니다. 파격적인 영상미학과 그 안에서 미세한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화면을 꽉 채우는 윤정희 배우의 존재감이 영화 <야행(1977)>의 당찬 완성도를 이끌었습니다.
[영화 정보]
제목: 야행(夜行)(1977)
영제: Voyage de Nuit
제작국가: 한국
감독: 김수용
캐스트: 윤정희, 신성일, 주증녀, 최희영, 최길호, 양일민, 이일웅, 이자영, 주현, 김홍지 등
장르: 로맨스/드라마
러닝타임: 76분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일: 1977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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