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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990년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 누군가의 '엄석대' vs 누군가의 '한병태'

by 조브라이언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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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내용 중에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 누군가의 '엄석대' vs 누군가의 '한병태'

1987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이문열 작가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Our Twisted Hero>는 <구로 아리랑(1989)>으로 장편 연출 데뷔한 박종원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입니다.

 

당시 16세였던 홍경인 배우를 비롯하여, 고정일, 정진강 등 어린이 배우들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면서 뛰어난 연기를 보였고, 신구, 최민식, 이진선 배우 등이 선생님 역할을, 태민영, 국정환, 권일수, 남영진 배우 등이 주요 캐릭터의 성인 역할로 등장하였습니다. 

 

1992년 개봉 당시 흥행 성적은 좋지 못했으나, 백상 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청룡영화상과 춘사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휩쓸며 작품성에서는 인정받았습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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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학원 강사 일을 하고 있는 40대 한병태(태민영). 조직 내의 알력 다툼 등에 환멸을 느낀 병태는 학원 강의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민학교 동창 황영수(남영진)로부터 예전 담임이었던 최 선생(신구)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은 병태. 안 그래도 소식이 궁금하던 당시 급장이었던 엄석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 선생의 장례식을 찾습니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병태의 기억은 30년 전, 국민학교 5학년 시절로 되돌아갑니다.

 

때는 자유당 정권 말기 1959년, 소위 '빽'이 없어 지방으로 좌천된 공무원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강원도 시골로 전학 오게 된 어린 병태(고정일). 서울 출신이라는 자신감을 만방에 떨치고 싶었으나, 담임 최 선생도 반 아이들도 서울 출신 병태에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반 생활에 억지로 자신을 구겨 넣으며 적응해 가던 병태의 레이다에 걸린 급장 엄석대(홍경인). 최 선생이 암묵적으로 부여한 절대권력을 손에 쥐고, 반 아이들을 쥐락펴락하는 독재자 석대의 존재가 못마땅한 병태는 석대를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애쓰지만 결과는 언제나 헛수고. 그나마 자신 있던 공부로 석대를 누르려했지만, 전교 1등은 언제나 석대 차지이니, 병태가 석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서 병태의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서울에서 전학 온 모범생이 아닌 온 학교 안의 말썽꾸러기로 낙인찍혀 버립니다. 그러다 꼬리를 내리고 석대의 그늘 아래에 숨어들기로 한 병태는 절대권력의 달콤함에 길들여지기 시작합니다.

 

해가 바뀌어 1960년이 되고, 새 학년의 시작과 함께 서울에서 부임해 온 젊고 패기 넘치는 새로운 담임 김정원 선생(최민식)이 반을 맡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정직과 진실, 용기에 대한 신념을 강조하는 김 선생의 등장과 함께, 석대의 절대 권력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권력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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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어느 시골 초등학교의 학급을 배경으로, 급장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하던 엄석대와 서울에서 전학 와 엄석대의 비정상적인 권력에 맞서던 한병태의 대립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한국 사회 전체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신랄합니다. 사실 '엄석대'라는 괴물이 탄생하기까지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은, 최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입니다. 담임인 최 선생이 급장에게 그토록 많은 권한을 주지 않았다면, 괴물 엄석대가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 괴물 엄석대를 키운 것도 어른(최 선생)이고, 나중에 괴물 엄석대의 치부를 드러나게 한 것도 어른(김 선생)이라는 씁쓸한 뒷맛이 남습니다.

 

반 아이들은 김 선생이 번호순대로 엄석대의 만행을 차례로 실토하라고 하기 전까지만 해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석대의 절대 권력 앞에 순응하며 조용히 살아오던 '대부분의 우리들'과 마찬가지의 모습이고, 서울 출신이라고 뻐기려다 명함도 못 내밀고 결국 엄석대의 권력의 그늘에 숨어든 한병태 또한 우리들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렇듯, 권력을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약자이자 서민이자 보통 사람들이 겪는 내적 갈등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 대부분 '한병태'의 위치와 비슷한 관객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성인이 된 병태를 비롯한 반 아이들의 관계성도 흥미롭습니다. '한병태'는 상징적인 주인공답게 '잘 나가지 못하는' 사회적 위치를 점한 성인이 되었고, 엄석대 휘하에서 체육부장 등 감투 하나씩 썼던 친구들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크게 성공한' 위치는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릴 때 작은 체구로 별 존재감 없던 임만순(국정환)이 재력가가 되어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게 되죠. 또 다른 아이러니는, 정의에 불타던 김 선생(최민식)이 국회의원이 되어 나타나, 굽실거리는 정치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는데요. 세월이 흐르면서 젊고 패기 넘치던 김 선생도 정치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버린 거겠죠. 끝끝내 엄석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엄석대' 이름 석자가 대문짝 만하게 새겨진 커다란 조화가 장례식장으로 배달 옵니다. 결국 영화는 석대의 현재를 세세하게 설명하고 보여주지 않지만, 병태의 시점으로는 여전히 씁쓸한 결말로 이어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디선가 '엄석대'는 존재하고, 또 수많은 '한병태'들은 내적 갈등에 휩싸이고, 패기 넘치던 '김 선생'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런 거겠죠.

 

[영화 정보]

국내 제목: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제: Our Twisted Hero
제작국가: 한국
감독: 박종원
캐스트: 홍경인, 고정일, 최민식, 태민영, 이진선, 신구, 우상전, 김혜옥 등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19분
관람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일: 1992년 8월 15일

 

주요 수상내역:

1993년 31회 대종상 3개 부문 수상 - 심사위원 특별상, 조명상, 편집상

1993년 29회 백상 예술대상 영화부문 4개 부문 수상 - 대상, 작품상, 감독상, 특별상(홍경인)

1993년 38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남우조연상(최민식)

1992년 13회 청룡영화상 3개 부문 수상 -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특별상(문혁, 고정일, 홍경인, 정진강)

1992년 3회 춘사영화제 5개 부문 수상 - 최우수 작품상, 우수연기상(아역)(홍경인, 고정일), 각색상, 편집상, 기술상(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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