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 - 마냥 흐뭇한 로맨스
※ 글 내용 중에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If the Sun Rises in the West>의 이은 감독은 1989년, 장동홍, 장윤현 감독과 공동 연출한 <오! 꿈의 나라> 이후 아내 심재명 대표와 함께 영화제작사 명필름을 창립하여 <코르셋(1996)><접속(1998)><조용한 가족(1998)>등의 제작자로 더 알려져 있었습니다.
1997년 흥행작 <비트>에서 상대역은 아니었지만 함께 출연했던 임창정, 고소영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하여, 평범한 외모의 야구심판과 전국구 스타 배우의 동화 같은 로맨스를 담은 이 영화는 마침 다음 해 개봉한 줄리아 로버츠, 휴 그랜트 주연의 <노팅 힐 Notting Hill(1999)>과 비슷한 결을 가졌습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는 대학생 현주(고소영)를 본 교통 의경 범수(임창정). 얼마 후, 무면허인 채로 운전 연습을 하던 현주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현주를 알아본 범수는 딱지 대신 학교 운동장에서 현주의 운전 연습을 돕습니다. 야구를 사랑하지만, 선수 대신 심판이 되고 싶다는 범수와 아직은 연기를 배우는 입장이지만 언젠가 배우로 성공하고 싶다는 현주, 둘은 각자의 꿈을 공유한 둘은 어느덧 마흔일곱 통이나 되는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그러다 현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범수. 하지만 현주는 유학을 떠날 거라며 범수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고, 대신 좋은 친구로 남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미 현주를 사랑하게 된 범수는, 현주와 친구가 될 순 없다며 현주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렇게 멀어지게 된 범수와 현주.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범수는 바라던 대로 야구 심판이 되었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현주 또한 꿈꾸던 대로 배우가 되었고, 본명인 남현주 대신 인기 스타 유하린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주가 모델인 지하철 라면 광고를 본 범수는 예전에 사랑하던 현주가 아닌 스타 하린에게 다가갈 수 없는 현실을 슬퍼합니다. 한편, 라면 회사의 젊고 유능한 사장 지민(차승원)은 자사 광고 모델인 하린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지민과 하린은 조금씩 친숙한 사이로 발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막전 시구를 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은 하린. 그런 하린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과도한 외침과 몸짓으로 1루심의 역할을 하는 범수. 하지만 하린은 그런 범수를 알아채지 못하고 야구장을 떠납니다. 그러다 우연히 야구경기 중계방송에서 심판이 된 범수를 발견한 하린은 유명 스타인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야구장을 찾아갑니다.
지민의 구애 공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각자의 꿈을 이루고 재회한 범수와 하린, 아니 현주는 몰래 데이트를 즐기는데... 과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없는 것일까요?
착한 사람, 착한 사랑
표준대국어사전에서 '착하다'의 뜻을 찾으면, 말하는 방식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고 상냥하다고 쓰여있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친절한 마음 씀씀이도 포함되겠죠, 물론. 요즘 유행하는 '가격이 착하다'는 말도 있는데, 'The price is good', 직역하면 '가격이 좋다', 이 정도면 지갑을 흔쾌히 열되 그렇게 부담되지 않는 가격에 판매한다, 정도가 될 텐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착하다'라고 합니다. 그럼 비싼 가격은 못된 건가.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이른바 못된 캐릭터가 없다는 겁니다. 극 전개상, 범수와 현주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빌런의 역할은 매니저 배선생님(동방우), 라면회사 표지민 사장(차승원)이 맡았고, 현주의 입장에서만 봤을 때 나름 거슬리는 빌런으로는 최유리(권민중)가 있고, 지민의 비서인 삼식(이범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배 선생도 지민도, 범수와 현주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막지 않습니다. 지민과의 결혼발표를 위한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 시구를 하러 가겠다는 현주/하린을 불러 세우는 배 선생의 외침은 결국 가서 누굴 찾으라며 도움을 주는 일종의 귀여운 반전이었고 (그런데 매니저라면서 왜 함께 달려 나가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아합니다), 범수와 현주의 키스 이후 클로즈업된 지민의 표정은 허탈해하면서도 뭔가 흐뭇함이 묻어납니다.
이렇듯 악독한 캐릭터가 없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스토리라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평범한 외모의 야구심판 범수와 인기 스타 하린의 로맨스는 길거리 데이트를 맘 놓고 하지 못하는 정도의 곤경만 있을 뿐, 두 사람의 사랑에 큰 걸림돌은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갈등의 깊이가 야트막하다 보니, 이야기 전개가 단조롭기는 합니다. 배 선생이 그나마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업계를 대표하는 지독한 역할을 맡았지만 캐릭터 자체의 매력은 떨어지고, 지민 캐릭터도 맹숭맹숭하긴 마찬가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역시, 부부동반으로 모이는 심판들의 송년회에 늘 혼자였던 범수가 하린을 데리고 가는 장면인데요. 유명인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 틈에 앉은 톱스타 하린을 보고 다들 놀라고 즐겁고 반가워하는 모습들이 흐뭇 하달 까요. 심지어 하린은 성격까지 무난하고 낯도 가리지 않아서 그 자리의 흥을 깰 일은 없습니다.
제작사 명필름은 1997년작 <접속>에 이어,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도 귀에 익은 명곡들을 선곡하여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정식으로 영화 본편에 삽입했는데요.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Early in the Morning", 미국 가수 로이 오비슨의 "You Got It" 등의 노래가 듣는 즐거움을 더해주었습니다.
또 하나의 즐거운 볼거리라면, 김응용, 김성한, 하일성 등 야구인들이 실명으로 카메오 출연하여 깨알 같은 잔재미를 담당하기도 했고, 무명 시절 박성웅, 김상경 배우도 스치듯 등장합니다.
[영화 정보]
국내 제목: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영제: If the Sun Rises in the West
제작국가: 한국
감독: 이은
캐스트: 임창정, 고소영, 차승원, 동방우(명계남), 강정식, 박용수, 유형관, 이두일, 최용민, 이범수, 장가현, 하일성, 김성한, 김응용, 권민중 등
장르: 로맨스/드라마
러닝타임: 100분
관람등급: 15세 관람가
개봉일: 1998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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