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용 중에 영화 <배드 럭 뱅잉(2021)>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드 럭 뱅잉(2021) - (별로 웃기지 않은)106분 짜리 거대한 농담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치러진 2021년 7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루마니아 영화 <배드 럭 뱅잉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
루마니아 영화라면 그나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Months, 3 Weeks & 2 Days(2007)>를 비롯한 크리스티안 문쥬 Christian Mungiu 감독의 작품들 외에는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요. 라두 주데 Radu Jude라는 낯선 감독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71번째 베를린 황금곰상 수상작이며 노골적인 성애 장면이 포함된 '무삭제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생각되어 CGV 기획전 'Cinema Adult Vacation'에서의 마지막 상영을 보기 위해 명동으로 갔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배드 럭 뱅잉'은 '불운한 성관계' 정도의 뜻일 텐데요. 뭔가 와닿지 않는 직역이라, (원제인 루마니아어는 문외한이라) 영어 제목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의 뜻을 살펴보니, '재수 없는/불운한 성관계 혹은 어처구니없는/멍청한/괴짜스러운 포르노' 정도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역시 제목부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니,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런 혼란스러움이 더욱 와닿았습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있는 저명한 중등학교에서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교사 에미(카티아 파스칼라우)는 남편 유진(스테판 스틸)과의 성행위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합니다. 유진이 성인 사이트에 업로드한 그 영상은 온라인 세상에서 순식간에 퍼져 버립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그 영상은 학교 내에 일대 파문을 일으키고, 영상이 유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학부모 회의가 긴급 소집되고 에미는 그 회의에 소환됩니다. COVID-19로 인한 팬데믹은 전 세계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고, 루마니아도 예외는 아닌 가운데, 에미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차별, 민족주의, 소비주의 등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픈 가운데 이런 문제까지 발생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과연 긴급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고,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될까요?
극심한 냉소주의로 인한 극도의 피로감
듣던 대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는 부부 사이의 행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노골적인 행위와 노출로 이루어져 있지만 에로티시즘과는 거리가 멉니다. <배드 럭 뱅잉>의 핵심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의 영상으로 시작된 영화는 총 3개의 장(章)으로 나누어 전개됩니다.
첫 번째 장은 긴급회의에 소집된 에미가 부쿠레슈티 곳곳을 다니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마치 관찰 카메라를 연상시키는 카메라 워크는 말하지 않아도 속이 타들어갈 에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에미의 발걸음을 쫓습니다. 교장의 집에 가기 전 꽃을 사고, 신경 안정제를 사러 약국에 들르고, 그 약을 먹기 위해 카페에 앉아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약을 삼키고, 인도에 댄 차주인과 시비가 붙고...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심경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여행이 불가능한 시점에 부쿠레슈티의 명소를 해외에 소개하는 관광 영상도 아닙니다. 그저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심드렁한 표정의 에미를 쫓아다니며, 시내 곳곳의 간판이며 광고를 그냥 한 번씩 훑듯이 보여줍니다. 일단, 재미는 없습니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두 번째 장은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예전에 집집마다 책장을 장식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사전의 책장을 무작위로 넘기듯, 단어들이 제시되고, 거기에 대한 감독 나름의 해석과 정의가 이어집니다. 제시되는 단어들에 일관성은 없습니다. '프랑스혁명', '루마니아 혁명', '사회적 거리두기', '구강성교', '사랑' 등 세어보진 못했지만 아무튼 수십 개의 단어와 표현에 대한 감독의 해석이 이어지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굉장히 시니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장에 가면, 드디어 긴급 회의장에 에미가 도착하고, 본격적인 (아무 말 대잔치 느낌의) 언쟁이 시작됩니다.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이고, 거기에 대한 에미와 학부형 측 그리고 학교 측의 의견 대립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성행위는 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한 범죄 행위도 아니고, 그것을 촬영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문제는 그 영상이 유출됐고, 어린 학생들이 거기에 노출되었다는 것이 학부형 측의 주된 논리인데, 하필 그 영상은 또 에미의 남편 유진이 성인 사이트에 올린 것이고, 그것이 삽시간에 퍼졌으니, 사이버 성범죄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겁니다. 아무튼 이런 각자의 입장 차이와 논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뭔가 예시를 들만한 사안이 나오면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그것을 찾아 아예 폰을 들고 읽으면서 말끔하게 결론내기 힘든 논쟁은 점점 더 지루해져만 갑니다.
그러다 감독은 아예 3가지 다른 엔딩을 제시하는데, 셋 중 어느 엔딩이 합당한 지 타당한지 수긍이 가는지, 맞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감독은 냉소주의를 머금은 썩소를 날리며 한바탕 거대한 농담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고, 그 농담에 진중한 반응을 보일 여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나마 세 번째 엔딩이 가장 막 나갔고, 통쾌하다면 통쾌할 수 있었지만, 이미 감독의 의도에 따른 1~3장까지 질질 끌려가면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그 통쾌함에 손뼉 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달까요.
[영화 정보]
국내 제목: 배드 럭 뱅잉
원제: Babardeală cu bucluc sau porno balamuc
영제: Bad Luck Banging or Loony Porn
제작국가: 루마니아/룩셈부르크/체코 공화국/크로아티아/스위스/영국
감독: 라두 주데
캐스트: 카티아 파스칼리우, 클라우디아 이레미아, 올림피아 말라이, 니코딤 웅그레아누 등
장르: 코미디/드라마
러닝타임: 106분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일: 2022년 7월 28일 (한국)/2021년 11월 19일(미국)
주요 수상내역:
2021년 7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
2021년 27회 부산 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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