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용 중에 영화 <애정의 조건 2(1996)>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애정의 조건 2(1996) - 궁금하지만 궁금하지 않았던 오로라의 후일담
1984년 56회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색상 등 주요 5개 부문을 석권한 제임스 L. 브룩스 James L. Brooks 감독의 <애정의 조건 Terms of Endearment(1983)>의 속편 <애정의 조건 2 The Evening Star>는 전편의 원작자인 고(故) 래리 맥머트리 Larry McMurtry(1936~2021)가 1992년 발표한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로버트 할링 Robert Harling이 직접 연출까지 맡았습니다.
오로라 역에는 <애정의 조건>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셜리 맥클레인 Shirley MacLaine이 돌아왔으며, 오로라의 새로운 로맨스 상대 제리 역에는 고(故) 빌 팩스턴 Bill Paxton(1955~2017)이 캐스팅되었습니다. 전편에서는 리사 하트 캐롤 Lisa Hart Carroll이 연기했던 엠마의 절친 팻시는 영국 배우 미란다 리차드슨 Miranda Richardson이, 베티 킹 Betty King이 연기했던 로지는 마리온 로스 Marion Ross가 맡았습니다. 엠마의 삼 남매 중 맏이인 토미는 조지 뉴번 George Newbern, 둘째 테디는 맥켄지 애스틴 Mackenzie Astin, 막내 멜라니는 줄리엣 루이스 Juliette Lewis가 등장합니다. 로지와 결혼하는 아서를 연기한 고(故) 벤 존슨 Ben Johnson(1918~1996)은 <마지막 영화관 The Last Picture Show(1971)>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었는데요. <애정의 조건 2>를 유작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전편에서의 은퇴한 우주비행사 개릿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던 잭 니콜슨 Jack Nicholson도 깜짝 카메오로 등장합니다.
전편에서 엄마 오로라가 딸 엠마를 먼저 떠나보내고 15년 후, 엠마가 남긴 세 남매와 엠마의 절친 팻시, 오로라의 집안 살림을 보살피던 친구 로지, 그리고 심리상담사 제리와의 이야기를 담은 속편 <애정의 조건 2>는 2,000만 달러(약 278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1996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했는데요. 공개 직후 평론가들의 혹평 세례와 함께 전 세계 박스오피스 최종 누적 수익 1,276만 달러(약 177억 원)를 기록하여 제작비 회수에도 실패하며 흥행 대참패를 기록했습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사랑하는 딸 엠마(데브라 윙거)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오로라 그린웨이(셜리 맥클레인)는 여전히 특유의 강인한 성품을 유지하며 꿋꿋이 살아가고 있지만, 엠마가 남긴 삼 남매를 돌보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마약 복용 혐의로 수감 중인 큰 손자 토미(조지 뉴번) 때문이라도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둘째 손자 테디(맥켄지 애스틴)는 이미 여자 친구와 아들까지 뒀지만, 오로라에게 데면데면하기는 마찬가지. 삼 남매 중 막내이자 유일한 손녀인 멜라니(줄리엣 루이스)만이 오로라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기회만 생기면 오로라의 곁을 떠나려 합니다.
오랫동안 오로라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 온 로지(마리온 로스)가 오로라의 삶에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이고, 한때 오로라의 로맨스 상대였던 퇴역 장군 헥터(도널드 모팻)는 이제 친구 같은 사이입니다. 엠마가 살아있을 때 가장 친한 친구였던 팻시(미란다 리차드슨)가 휴스턴에 살고 있는데, 엠마가 죽기 직전 자신이 돌보고 싶어 했던 멜라니의 고민 상담을 도맡아 하고, 오로라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친구를 따라 오로라의 집을 나갔던 멜라니는 남자 친구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팻시에게 S.O.S. 를 쳐 팻시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팻시가 복용 중인 약물을 잔뜩 입안에 욱여넣고 응급실에 실려간 멜라니. 얼마 후, 멜라니는 새롭게 사귄 남자 친구 브루스(스콧 울프)와 함께 LA에서 새 출발을 하러 떠납니다.
한편, 예전에 우주비행사 출신 개릿(잭 니콜슨)이 살던 집으로 이사 온 아서(벤 존슨)는 로지에게 애정공세를 펼칩니다. 그러다 오로라의 외로움이 신경 쓰인 로지는 자신이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는 길에 같이 가달라고 오로라에게 간청하는데, 알고 보니 이는 로지가 오로라를 위해 마련한 상담이었던 것. 난데없이 심리상담사 제리(빌 팩스턴)와 마주하게 된 오로라는 자신이 아직도 운명 같은 사랑을 찾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 그간의 인생을 모두 담는 자신의 연대기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박수칠 때 떠났으면 더 좋았을걸
<애정의 조건 2>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로버트 할링은 여성 캐릭터들의 끈끈한 연대가 돋보였던 <철목련 Steel Magnolias(1989)>이나 <조강지처 클럽 The First Wives Club(1996)>의 각본가로 유명한데요. <애정의 조건 2>는 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연출 작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편 <애정의 조건>이 워낙 높게 평가받은 수작이기도 하고, 같은 원작자의 소설을 토대로 한 후일담이긴 하지만, <애정의 조건 2>는 전편이 지녔던 미덕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평범 이하의 졸작이라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전편과의 연결고리를 위해 데브라 윙거, 제프 다니엘스 등 속편에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들을 사진으로 대체하고, 마이클 고어 Michael Gore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일부 차용한 듯한 스코어로 둘러 씌운 오프닝 타이틀은, '이 영화는 <애정의 조건>의 속편입니다, 아시겠죠?' 라며 주입시키려 애씁니다. 그리고 셜리 맥클레인이 연기한 오로라가 등장하면, '아, 그렇다. 내가 보고 있는 영화는 딸 엠마를 떠나보낸 엄마 오로라가 그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속편이다'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편으로부터 15년이 흘러 각자 성인이 된 삼 남매 캐릭터 중 어느 하나도 오로라와 '케미'가 돋보이지 않습니다. 전편에 비해 비중이 확 늘어난 팻시와 오로라의 라이벌 관계도 너무 어색하고 억지스럽습니다. 전편에서 엠마가 죽기 직전, 막내딸 멜라니'만' 팻시가 맡아 기르고 싶다고 했다가, 결국 삼 남매 모두 오로라가 맡게 되었다는 그 설정 하나만으로, 팻시가 멜라니와 그렇게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팻시 캐릭터의 비중을 늘리기 위한 장치였을 뿐, 개연성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편에 비해 비중이 확 늘어난 또 다른 캐릭터인 로지도 마찬가지인데요. 속편을 짜내다 보니, 오로라와 삼 남매와의 이야기만으로는 아무래도 뭔가 부족한 듯싶어서 취한 조치이겠지만, 오로라와 로지의 관계성을 너무 부각한 부분도 억지스럽습니다. 전편에서는 비중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거의 없다시피 해서, 오로라와 로지 사이의 빌드업이 부족한 상태에서 너무 인생의 친구로 밀어붙였달까요.
하지만 <애정의 조건 2>에서 가장 어색한 관계는 아무래도 심리상담사 제리와의 로맨스일 겁니다. 제리 캐릭터 자체가 평면적이기도 하지만, 셜리 맥클레인과 빌 팩스턴, 두 배우 사이에 로맨틱한 기류는 전혀 흐르지 않습니다. 극 중 설정도, 오로라가 제리의 엄마 뻘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나이차가 아니었죠. 적어도 전편에서 개릿과 오로라의 로맨스에는 맥락이 충분히 넘쳤지만, 오로라와 제리의 관계는 1990년대 양산된 평범한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클리셰 그 자체였기에, 진부할 뿐이었죠.
그나마 <애정의 조건 2>에서 숨통이 트이는 부분은, 개릿 역의 잭 니콜슨의 등장이었습니다. 15년 만에 재회한 오로라와 개릿의 장면들이 나오자, 비로소 마음이 다소 안정되면서, 화가 치밀뻔했던 안일한 속편에 대한 원망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개릿이 퇴장하면서 영화는 다시 뻔한 할리우드 속편으로서의 본분을 찾아갑니다. 결국 <애정의 조건 2>는 <애정의 조건>을 최고의 영화라고 손꼽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버린 못된 속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정보]
국내 제목: 애정의 조건 2
원제: The Evening Star
제작국가: 미국
감독: 로버트 할링
캐스트: 셜리 맥클레인, 빌 팩스턴, 줄리엣 루이스, 미란다 리차드슨, 벤 존슨, 스콧 울프, 조지 뉴번, 마리온 로스, 맥켄지 애스틴, 도널드 모팻, 잭 니콜슨 등
장르: 드라마/로맨스
러닝타임: 129분
관람등급: 15세 관람가
개봉일: 1996년 12월 25일(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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