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용 중에 영화 <블론드(2022)>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블론드(2022) - 고인모독(故人冒瀆)
미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이면서 시인인 조이스 캐롤 오츠 Joyce Carol Oates가 2000년 발표한 동명의 장편 소설을 원작으로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The Assassination of Jesse James by the Coward Robert Ford(2007)><킬링 소프틀리 Killing Them Softly(2012)>등을 연출한 뉴질랜드 출신 앤드류 도미닉 Andrew Dominik이 각본과 연출을 겸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블론드 Blonde>가 2022년 7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2022년 9월 28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었습니다.
<블론드>는 노마 진 모텐슨 Norma Jeane Mortenson으로 1926년 태어나 마릴린 몬로 Marilyn Monroe로 1962년 3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미국의 배우이자 가수이자 모델이었던 인물의 생애를 조이스 캐롤 오츠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낸 허구라고는 하지만, 버젓이 '마릴린 몬로'라는 이름부터 그의 주요 출연 영화들의 주요 장면 등 실제 벌어졌던 일들은 고스란히 재현하면서, 그의 사생활과 관련한 루머와 음모론 등은 작가의 상상이라는 미명 아래 조잡한 촬영기법 등을 동원하여 원색적으로 구현했습니다.
앤드류 도미닉의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 브래드 피트 Brad Pitt의 제작사 플랜비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했고, 브래드 피트의 이름도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오른 영화 <블론드>는 영화 속 성적인 요소들을 근거로, 미국 영화 등급시스템의 최고 수위 등급인 'NC-17(Adults Only, 17세 미만 관람 불가)'를 받았는데요. 스트리밍 서비스로 배급되는 영화 중 'NC-17' 등급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2019)><007 노 타임 투 다이 No Time to Die(2021)>의 아나 데 아르마스 Ana de Armas가 마릴린 몬로를 연기했고, 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nski의 <피아니스트 The Pianist(2002)>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애드리언 브로디 Adrien Brody가 몬로의 세 번째 남편인 극작가 아서 밀러 Arthur Miller를 연기했습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어린 노마 진 모텐슨(릴리 피셔)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어머니 글래디스(줄리앤 니콜슨)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노마 진의 일곱 번째 생일날, 글래디스는 깜짝 생일 선물을 준비했다고 수선을 피웁니다. 노마 진의 침대 머리맡 벽에 걸린 한 남자의 사진이 담긴 액자. 글래디스는 사진 속 남자가 노마 진의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날 밤늦은 시각, 할리우드 힐스에 화재사고가 일어나고, 글래디스는 노마 진을 차에 태우고 노마 진의 아버지가 거기 살고 있다며 기어이 찾아갑니다. 하지만 경찰의 저지로 결국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격노한 글래디스는 아버지에 대해 묻는 노마 진을 욕조 물에 빠뜨리려 하지만, 결국 노마 진은 글래디스의 손에서 벗어나 옆집 이웃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며칠 후, 글래디스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노마 진은 고아원에 맡겨지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1940년대 '마릴린 몬로'라는 예명의 핀업걸이 된 노마 진은 몇몇 잡지와 달력 화보에 실립니다. 그러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노마 진은 영화 <돈 보더 투 노크 Don't Bother to Knock(1952)>의 넬 역할을 위한 오디션을 봅니다. 하지만 감정이 격해져 눈물을 터뜨리는 바람에 오디션을 망쳤지만, 캐스팅 디렉터의 눈에는 노마 진의 그런 모습이 충분히 인상적이었기에 노마 진을 넬 역할로 캐스팅합니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서서히 쌓아가던 중, 찰리 채플린의 아들이자 배우인 찰스 '캐스' 채플린(자비에 사무엘)과 역시 배우인 에드워드 G. 로빈슨 주니어(에반 윌리엄스)를 만나 야릇한 관계에 빠져듭니다. 1953년, 영화 <나이아가라 Niagara(1955)>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지만, 공개석상에서 캐스, 에디와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된 후, 스튜디오 대표로부터 그들과 함께 대중에게 노출되는 일을 자제하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일로 인해 노마 진은 화가 나는데, 마릴린 몬로라는 존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아닌 그저 작품에서 맡은 역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노마 진은 임신을 하게 되어 기쁨에 들뜨지만, 어머니 글래디스가 가졌던 정신적 문제를 물려주게 될까 봐 두려운 나머지 낙태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낙태 수술 당일, 노마 진은 마음을 바꾸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얼마 후 은퇴한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를 만난 노마 진은 할리우드를 벗어나 뉴욕에서 좀 더 진중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하고, 조는 그런 노마 진의 바람에 공감합니다. 얼마 후,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Gentlemen Prefer Blondes(1953)> 촬영이 한창이던 중, 노마 진은 자신이 노마 진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남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습니다. 영화 시사회장에서 스크린 속 연기하는 마릴린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여기는 노마 진. 스태프로부터 호텔 방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노마 진은 혹시 자신의 아버지가 아닐까 잔뜩 기대에 부풀어 방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에는 노마 진에게 청혼하려는 조가 기다리고 있었고, 노마 진은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캐스와 에디가 노마 진의 누드 사진 몇 장을 조에게 보여주면서, 노마 진과 조의 결혼 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화가 난 조는 노마 진을 때리면서 영화 <7년 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1955)>에 출연하지 말라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노마 진은 <7년 만의 외출> 촬영을 강행하고, 그 유명한 지하철 환풍구 위 하얀 드레스 장면이 탄생합니다. 영화 홍보를 위해 명장면을 기자들 앞에서 재현하는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조는 집에 돌아와 술에 잔뜩 취해 노마 진을 마구 때리고 학대합니다. 결국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는 노마 진.
1955년, 노마 진은 저명한 작가 아서 밀러(애드리언 브로디)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브로드웨이 연극 <마그다> 오디션에 참여합니다. 대본 리딩에서 노마 진의 연기에 모두 감탄하지만, 아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노마 진이 캐릭터에 대한 통찰력 넘치는 분석을 이야기하면서, 아서는 노마 진에게 서서히 매료됩니다. 노마 진과 아서는 곧 결혼식을 올리고, 메인으로 이사합니다. 그곳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노마 진은 임신합니다. 그러다 해변을 산책하던 중 발을 헛디뎌 그만 유산하게 된 노마 진은 크게 좌절하고, 얼마 후 다시 영화계에 복귀합니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를 촬영하면서 점점 더 걷잡을 수 없게 된 노마 진. 언론의 끊임없는 관심에 고무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대중의 놀림감이 된 것처럼 느껴지고, 촬영장에서 빌리 와일더(라빌 이스야노프) 감독과 충돌이 잦아지면서, 남편 아서와의 관계도 소원해집니다. 스트레스에 복받친 노마 진은 결국 약을 먹기 시작합니다.
1962년, 노마 진은 약과 알코올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FBI 요원들이 노마 진을 어느 호텔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대통령'과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에서 성적 수치심과 불쾌함에 절은 노마 진 은 지나친 약물 복용으로 인한 멍한 상태에서 또 다른 낙태 시술에 대한 환각을 경험하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노마 진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 에디는 전화를 통해 캐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캐스가 노마 진에게 뭔가를 남겼다고 말하지만, 노마 진은 그게 뭔지 알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 에디가 보낸 소포가 노마 진에게 배달됩니다. 상자 안에는 노마 진이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호랑이 봉제 인형과 이제껏 노마 진의 아버지가 보냈다고 믿었던 그 편지의 주인공은 실제 노마 진의 아버지가 맞다고 고백하는 편지가 함께 들어있었습니다.
사실을 알게 된 노마 진은 충격에 휩싸이고, 바르비투르산염을 잔뜩 복용하고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돌아가 눕습니다. 잠들 듯 숨을 거둔 노마 진은 일곱 번째 생일날 어머니 글래디스가 생일 선물로 줬던 사진 액자 속 남자, 자신의 아버지의 환영을 보며 사후 세계로 인도받습니다.
고인을 두 번 죽이는 발칙한 상상
영화 <블론드>의 제작진이며 배우들은 계속 강조합니다. 영화 <블론드>는 마릴린 먼로의 생애를 다루긴 했지만,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된 '픽션'이라고. 하지만, 영화 <블론드>는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나도록 시대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일말의 애정은 느껴지지 않는 오만방자한 프로젝트입니다. 3번의 결혼을 했지만 출산한 자식이 하나도 없고, 배다른 자매인 작가 베르니스 베이커 미라클 Berniece Baker Miracle(1919~2014)마저 고인이 되었으니, 2022년 현재 남아 있는 마릴린 몬로의 유족은 단 한 명도 없다지만, 아무리 대단한 작가로 위상이 높은 원작자의 픽션을 원작으로 했다지만, 영화 <블론드>는 마릴린 몬로를 모욕하고 욕보이며 또 모욕하고 또 욕보이는 영화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계 아이콘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 영화는 꽤 많이 제작되어 왔습니다. 최근에만 해도,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1935~1977)의 생애를 그린 <엘비스 Elvis(2022>도 그렇고, 아직 생존해 있는 아티스트 엘튼 존 Elton John(1947~)을 주인공으로 한 <로켓맨 Rocketman(2019)>도 그렇고,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1946~1991)의 이야기를 담은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dosy(2018)> 등을 보면, 각각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적 성취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영화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블론드>에서는 작가도 감독도 마릴린 몬로라는 인물에 대해 대체 어떤 생각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이 충분할 정도로, 시종일관 주인공을 마구잡이로 휘둘리게 하고 괴롭히는 아주 못된 시선으로 가득합니다.
캐스, 에디와의 쓰리썸 장면에서 기괴한 촬영기법을 동원한다던가, 흑백과 컬러 화면을 넘나드는 기교도 그저 야트막한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고, 1: 1, 1.37: 1, 1.85:1, 2.39: 1 등 화면비를 오락가락하는 식도 그저 기교에만 집착하는 앤드류 도미닉의 장난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픽션'임을 강조하면서도 실제 마릴린 몬로의 출연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지하철 환풍구 명장면 등을 재현하는 데 급급하여, 픽션과 논픽션의 의미 없는 경계선을 넘나드는 그 얄팍한 수작엔 혀가 내둘립니다.
그런 가운데, 최악은 역시 신체 특정 부위의 내부 시점에서 신체 안으로 들어오는 낙태 기구를 클로즈업하는 두 번의 장면과 누가 봐도 존 F. 케네디임을 알 수 있는 '대통령'과의 구강성교 장면이었습니다. 아나 데 아르마스는 어쩌면 '인생 캐릭터'를 만난 배우 인생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음에도, 이렇듯 난잡하고 조잡한 설정들이 난무하는 이 영화에서 그토록 훌륭한 연기를 펼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2시간 4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도 그저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단 10분이면 어떻습니까. 마릴린 몬로라는 인물과 그녀가 남긴 문화적 유산에 대한 진중한 관찰과 고민이 있었다면, 단 10분의 짤막한 단편이었더라도 충분히 '선한 의도'를 전할 수 있었을 텐데요.
[영화 정보]
국내 제목: 블론드
원제: Blonde
제작국가: 미국
감독: 앤드류 도미닉
캐스트: 아나 데 아르마스, 줄리앤 니콜슨, 타이 루냔, 마이클 드레이어, 새라 팩스턴, 라이언 빈센트, 패트릭 브레넌, 에반 윌리엄스, 자비에 사무엘, 댄 버틀러, 데비이드 워쇼프스키, 레베카 위속키, 토비 허스, 에릭 매터니, 바비 캐너발레, 루시 드비토, 애드리언 브로디, 캐스퍼 필립슨 등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66분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일: 2022년 9월 28일(넷플릭스)/2022년 9월 16일(미국)
주요 수상내역:
2022년 7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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