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용 중에 영화 <마이 라이프(1993)>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이 라이프(1993) - "늦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사랑과 영혼 Ghost(1990)>으로 63회 아카데미 오리지널 각본상을 받은 브루스 조엘 루빈 Bruce Joel Rubin이 각본을 쓰고 연출을 겸한 감독 데뷔작 <마이 라이프 My Life>는 팀 버튼 Tim Burton의 <배트맨 Batman(1989)><배트맨 2 Batman Returns(1992)>에서 배트맨/브루스 웨인을 연기한 마이클 키튼 Michael Keaton과 <폭풍의 질주 Days of Thunder(1990)><파 앤드 어웨이 Far and Away(1992)> 등으로 1990년대 할리우드의 주연급 스타로 급부상했던 니콜 키드먼 Nicole Kidman이 주연을 맡은 가족 드라마입니다.
약 2,000만 달러(약 288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마이 라이프>는 콜럼비아 픽쳐스 배급으로 1993년 11월 12일 북미에서 개봉해, 디즈니의 <삼총사 The Three Musketeers(1993)>, 브라이언 드 팔마 Brian De Palma 감독, 알 파치노 Al Pacino 주연의 범죄 드라마 <칼리토 Carlito's Way(1993)>에 이어 주말 박스오피스 3위로 데뷔했으나, 전 세계 박스오피스 누적 수익은 5,400만 달러(약 778억 원)를 기록하며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로튼 토마토 지수 44%(25개 리뷰 기준)로 평론가들로부터도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습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인 부모를 둔 어린 밥 이바노비치(대니 리머)는 밤하늘 별을 보며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제발 다음 날, 집 뒷마당에 실제 서커스 공연이 펼쳐지게 해 달라고요. 다음 날 학교에서 함께 서커스를 보러 갈 친구들을 모은 밥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친구들과 집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서커스단이 있을리가요. 밥의 황당한 소원에 밥의 부모는 당황할 뿐이고, 잔뜩 화가 난 밥은 자신의 방 옷장 안에 들어가 숨습니다.
밥은 자라면서 우크라이나 출신 부모가 지키려는 전통과 관습에 진저리를 내고, 고향인 디트로이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독립합니다. 30년 후, 성인이 되어 자신의 성(姓)까지 '존스'로 바꾼 밥(마이클 키튼)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홍보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게일(니콜 키드먼)은 첫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니,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게 된 밥은 행복합니다. 그러다 신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 밥은 어쩌면 자신의 첫 번째 아기가 태어나는 것조차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랍니다.
그때부터 밥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태어날 아이가 볼 수 있도록, 밥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여러 가지 것들을 영상으로 찍기 시작합니다. 자신만의 스파게티 요리법이라던가, 미팅에서 자신 있게 첫인사를 하는 자신만의 비법 등을 하나하나 비디오로 촬영하는 밥. 그러던 어느 날 게일의 친구 아버지가 말기암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는 중국 치료사 호 선생(행 S. 응고르)을 만나도록 게일이 밥을 설득합니다. 현대 의학 기술로도 완치할 수 없는 자신의 병이 나을 리가 없다며 영 내켜하지 않던 밥을 만난 호 선생은 밥에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말하며, 그저 듣기만 하더라도 삶이란 그에게 주는 초대장과도 같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게일로부터 전해 들은 동생 폴(브래들리 휘트포드)의 결혼 소식. 디트로이트를 떠난 후 거의 연을 끊다시피 살아온 밥은 그 또한 내키지 않았지만, 게일의 설득에 못 이겨 디트로이트행 비행기에 올라탑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도 찾아가 보고, 가족들과의 사이에 굳게 내쳐진 보이지 않는 벽도 허물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실패.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디트로이트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부모 곁에 머무는 동생 폴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밥의 부모는 아들이 고향으로부터 멀리 떠나 성까지 바꾼 사실이 못내 서운합니다.
아무런 갈등도 풀지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밥. 어쩌면 이번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 고향 방문이 될지도 모른다며 게일에게 말하는 밥의 마음은 못내 씁쓸합니다. 그리고 다시 호 선생을 찾아간 밥. 호 선생은 밥에게 어서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합니다. 얼마 후, 게일의 뱃속 아기가 아들이 될 거라는 걸 알게 된 밥은 아들에게 면도, 농구, 자동차 배터리 연결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영상을 촬영합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커다란 두려움이었던 롤러코스터 타기에도 도전합니다. 옆자리에 앉은 어린이가 두려움을 떨치려면 손잡이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지만, 밥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못합니다.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밥은 게일에게 말합니다. 오늘이 의사가 말했던 자신의 사망 예정일이었다고.
드디어 게일에게 진통이 시작되고, 건강한 남자 아기를 출산합니다. 아기의 이름을 브라이언이라 지은 밥과 게일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밥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더니 급기야 암세포가 뇌에까지 전이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충분히 예측 가능하지만 결국 눈물샘을 자극시키는 드라마
각본가 브루스 조엘 루빈의 감독 데뷔작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연출작이 된 <마이 라이프>는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온화한 시선이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죽음을 앞둔 남자가 태어날 자식에게 남길 영상을 촬영한다는 설정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지만, 중간중간 다소 작위적인 장면들은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밥이 남긴 영상을 보는 어린 아들 브라이언이 영상 속 밥을 보며 '아빠'를 부르는 엔딩은 무난해 보이기는 하지만, 망자가 살아남은 사람들을 옥죄는 듯하여 숨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면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것일까요. 영상을 촬영하는 밥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자신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인 게일이 훗날 새 출발을 할 수도 있다면서도 '네 아빠는 나야'라는 불변의 사실을 강조하는 대목도 그냥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시나 남은 사람들의 새 출발을 발목 잡는 듯 느껴져 영 거북하더라고요. 남편이 죽을 때 함께 따라 죽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 살아남은 여자를 뜻한다는 '미망인(未亡人)'이라 부르던 고질적인 예전 악습이 떠오른 것이 지나친 반응일까요(어쩌면 제가 너무 깊게 과대 해석한 것일 수도 있고요).
<킬링 필드 The Killing Fields(1984)>로 57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던 캄보디아 출신 미국 산부인과 전문의이자 배우이자 작가였던 고(故) 행 S. 응고르 Haing S. Ngor(1940~1996)의 등장은 괜스레 반갑고 찡했습니다. 결국 밥에게 깨달음을 전해 준 호 선생의 가르침이 의학적 근거를 가진 처방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밥이 평생 가졌던 가족에 대한 불만과 원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깨뜨릴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역할이었던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혹시라도 각본과 연출을 맡은 브루스 조엘 루빈이 뭔가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나 싶은 궁금증도 생겼습니다. 물론 그것을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허상이라고까지는 더 나아가지 않겠습니다.
주연을 맡은 마이클 키튼과 니콜 키드먼의 부부 케미는 기대보다는 덜했지만, 각자 맡은 캐릭터를 소화해낸 부분은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죽음을 준비하며 촬영하는 영상 속 장면들은 보기에 따라 오글거리기 일쑤였지만, 그 영상 속 배우가 마이클 키튼이었기에 마냥 오글거리지만은 않게 수위를 잘 조절했달까요. 밥의 아내 게일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할리우드의 라이징 스타이자 톰 크루즈와 부부가 되어 유명세를 떨치던 니콜 키드먼이 외모만을 앞세우지 않고 진중한 연기력을 갖춘 좋은 배우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결국 밥과 가족들 사이에 오랜 시간 자리했던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은, 안타깝게도 밥이 죽음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 때였는데요. 어린 시절, 왜인지 모르지만 집 뒷마당에 서커스 공연이 펼쳐지길 간절히 바라던 밥의 소원이 이뤄지던 순간은, 영화 <마이 라이프>에서 참고 있던 눈물샘이 크게 자극받은 장면이었습니다. 눈앞에서 서커스단을 보며 믿기지 않아 하던 밥에게 아버지 빌이 말하죠, "늦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Better late, than never". 결국 예측 가능한 갈등과 화해로 쉬워 보이는 드라마에 가졌던 아쉬움이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든 명대사였습니다.
[영화 정보]
국내 제목: 마이 라이프
원제: My Life
제작국가: 미국
감독: 브루스 조엘 루빈
캐스트: 마이클 키튼, 니콜 키드먼, 브래들리 휘트포드, 퀸 라티파, 마이클 콘스탄틴, 레베카 슐, 리 갈링톤, 토니 소여, 행 S. 응고르, 로미 로즈몬트 등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12분
관람등급: 12세 관람가
개봉일: 1994년 7월 2일 (한국)/1993년 11월 12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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