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용 중에 영화 <레퀴엠(2000)>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퀴엠(2000) -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될성부른 떡잎 시절
SF 스릴러 <파이 Pi(1998)>로 데뷔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Darren Aronofsky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2000)>은 미국 작가 휴버트 셀비 주니어 Hubert Selby Jr.(1928~2004)가 1978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아로노프스키와 셀비 주니어가 공동 각색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사이코드라마입니다.
약물중독으로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네 인물의 파국을 그린 영화 <레퀴엠>에서 사라 골드파브를 연기한 엘렌 버스틴 Ellen Burstyn은 <마지막 영화관 The Last Picture Show(1972)><엑소시스트 The Exorcist(1973)> 등의 대표작과 함께, 마틴 스콜시즈 Martin Scorsese 감독의 <앨리스는 더 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 Alice Doesn't Live Here Anymore(1974)>로 47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었는데요. <레퀴엠>에서의 압도적인 연기로 <부활 Resurrection(1980)>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이후 20년 만에 통산 6번째 아카데미 노미네이션을 기록했습니다.
엘렌 버스틴은 그해 오스카 레이스에서 시카고, 보스턴, 라스 베가스 등 평론가협회와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새털라이트 어워즈 등에서 수상함은 물론, 40대 초반 때 첫 수상 이후 26년이 지나 60대 후반이 된 배우의 드라마틱한 두 번째 수상 장면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강력한 프런트러너였던 <에린 브로코비치 Erin Brockovich(2000)>의 줄리아 로버츠 Julia Roberts가 그해 수상자로 호명되었습니다.
사라 골드파브의 아들 해리는 <아메리칸 퀼트 How to Make an American Quilt(1995)로 데뷔한 후 <파이트 클럽 Fight Club(1999)><처음 만나는 자유 Girl, Interrupted(1999)><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2000)> 등에 출연했던 자레드 레토 Jared Leto가 연기했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에서 데보라 아역으로 데뷔 후 청춘스타로 인기를 모았던 제니퍼 코넬리 Jennifer Connelly가 해리의 여자친구 마리온 역으로 파격적인 연기를 보였습니다.
해리의 친구 타이론은 코미디 배우로 이미지가 강한 말론 웨이언즈 Marlon Wayans가 연기해, 충격의 강도를 더했고, 그 외에 크리스토퍼 맥도널드 Christopher McDonald, 마크 마골리스 Mark Margolis, 루이즈 래서 Louise Lasser, 키스 데이비드 Keith David, 딜런 베이커 Dylan Baker 등이 함께 출연했습니다.
450만 달러(약 57억 원)라는 저예산으로 제작된 <레퀴엠>은 2000년 53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어 전 세계 최초 공개된 후, 같은 해 12월 6일 아티잔 엔터테인먼트 배급으로 북미에서 개봉했고, 전 세계 박스오피스 최종 누적 수익은 739만 달러(약 94억 원)를 기록했습니다.
영화의 제목이자 원작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Requiem for a Dream'을 직역하면 '꿈을 위한 진혼곡(鎭魂曲)'인데요. '진혼곡' 즉 '레퀴엠'은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모든 종류의 음악, 혹은 미사 음악을 뜻하는데, 극 중 절망의 끝에 선 네 주인공이 각자 간직했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처절한 파국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뉴욕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사는 사라 골드파브(엘렌 버스틴)는 종일 TV를 보면서 지냅니다. 사라의 아들 해리(자레드 레토)는 마리온(제니퍼 코넬리)과 사귀고 있고, 친구 타이론(말론 웨이언즈)과도 어울리는데, 안타깝게도 셋 다 헤로인 중독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 친구는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헤로인 거래를 합니다. 해리와 마리온은 마리온이 디자인한 옷 가게를 열 계획이며, 타이론은 빈민가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랍니다.
희망 없는 나날이 이어지던 중, 사라에게 걸려온 반가운 전화 한 통. 평소 사라가 즐겨보는 TV쇼에 초대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후부터, 사라는 해리의 졸업식 때 입었던 빨간 드레스에 몸을 맞추기 위해 본격적이고 혹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살이 안 빠져 고민이던 사라에게 친구 레이(마샤 진 커츠)가 조언을 합니다.
식욕 조절에 특효약이라는 암페타민을 처방해주는 의사를 찾아가라는 것. 암페타민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체중이 줄기 시작하는 사라는 축 늘어져 TV만 보던 자신에게 아직 활기찬 에너지가 남아있음에 기뻐합니다. 그러다 사라에게서 약물 남용의 징후를 감지한 아들 해리가 암페타민 복용을 즉시 중단하라고 간청하지만, 사라는 TV에 출연한 기회뿐 아니라, 주변 친구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감탄하는 찬사를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암페타민을 끊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 테니, 사라는 그 약에 점점 더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임페타민 복용량이 점점 늘어나면서 사라는 TV쇼 출연을 고대하며 착란 증세가 도지기 시작하고, 점점 광기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편, 마약 밀매업자와 시실리 마피아 사이에 벌어진 총격전에 휘말린 타이론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무시당하고, 경찰에 체포당합니다. 해리가 친구 타이론을 위한 보석금을 충당하려면, 자신이 모은 돈 대부분을 써야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갱단 사이에 벌어진 마약전쟁의 결과로, 헤로인의 공급선이 제한되어 전과 같이 쉽게 헤로인을 구할 수도 없는 지경. 그러다 플로리다에서 뉴욕으로 들여오는 대규모 화물 수송 정보를 타이론이 입수하지만, 구매가는 두 배로 뛴 데다 최소 구매에 따르는 위험도 막대합니다. 고심하던 해리는 마리온에게 신경정신과 전문의 아놀드(숀 걸레트)를 상대로 한 성매매를 권하기에 이르고, 이로 인해 해리와 마리온 사이에 금단 증상과 더불어 둘의 관계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지독한 사이코드라마
두 번째 장편 연출작 <레퀴엠>의 성공 이후, 세 번째 작품인 로맨스 서사극 <천년을 흐르는 사랑 The Fountain(2006)>이 평단으로부터도 관객들로부터도 별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차기작 <더 레슬러 The Wrestler(2008)>로 65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데 이어 왕년의 미남스타였다가 쇠락의 길을 걷던 미키 루크 Mickey Rourke가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뒤이은 <블랙 스완 Black Swan(2010)>에 이르러서는 지독한 심리스릴러의 극치를 보이며, 주연 나탈리 포트먼 Natalie Portman은 83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제니퍼 로렌스 Jennifer Lawrence, 하비에르 바르뎀 Javier Bardem 주연의 <마더! Mother!(2017)>는 아로노프스키의 악취미가 대체 어디까지 갈지, 커다란 논란과 함께 <더 레슬러><블랙 스완>에 이어 3편 연속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습니다.
<마더!> 이후 5년 만의 신작인 <더 웨일 The Whale(2022)> 또한 2022년 7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었는데요. 마치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와 같이, 1990년대~2000년대에 주연급으로 맹활약했으나 최근에는 잊힌 스타가 된 브렌든 프레이저 Brendan Fraser가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오스카 레이스 남우주연상 부문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데뷔작인 <파이>에서도 이미 그 지독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레퀴엠>을 보면 아로노프스키의 한치 양보도 없이 주인공들을 극한으로 내모는 못된(?) 연출이 돋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약물 중독의 위험을 알리는 공익적인 목표를 내포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중독자 네 명은 브레이크 없는 고속열차에 올라탄 듯 빠른 속도로 망가져 가고, 그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인물들을 그렇게 밀어붙이다 보니,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괴로울 수밖에 없고, 문자 그래도 두 눈 뜨고 바라보기 힘든 지경에 빠집니다.
클린트 맨셀 Clint Mansell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마치 이 영화의 제목인 '레퀴엠'을 계속 상기시켜 주듯이, 냉정한 멜로디를 차갑게 쏟아냅니다. 대체 저 넷의 고통과 악몽에 종착역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요. 정말 끝갈 데 없는 처절한 파국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정보]
국내 제목: 레퀴엠
원제: Requiem for a Dream
제작국가: 미국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캐스트: 엘렌 버스틴, 자레드 레토, 제니퍼 코넬리, 말론 웨이언즈, 크리스토퍼 맥도널드, 루이즈 래서, 키스 데이비드, 딜런 베이커 등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00분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일: 2002년 7월 12일 (한국)/2000년 12월 6일(미국)
주요 수상내역:
2001년 73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엘렌 버스틴)
2000년 53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 초청
2001년 7회 미국 배우조합 SAG어워즈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엘렌 버스틴)
2001년 58회 골든 글로브 어워즈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엘렌 버스틴)
2001년 16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2개 부문 수상 - 여우주연상(엘렌 버스틴), 촬영상
2001년 5회 새털라이트 어워즈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수상(엘렌 버스틴)
2001년 72회 내셔널 보드 오브 리뷰 어워즈 특별상 수상
2000년 21회 보스턴 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수상(엘렌 버스틴)
2001년 13회 시카고 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수상(엘렌 버스틴)
2001년 4회 온라인 영화평론가협회상 4개 부문 수상 - 감독상, 여우주연상(엘렌 버스틴), 편집상, 오리지널 스코어상
2001년 캔자스 시티 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수상(엘렌 버스틴)
2001년 라스 베가스 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수상(엘렌 버스틴)
2001년 피닉스 영화평론가협회상 2개 부문 수상 - 여우주연상(엘렌 버스틴), 편집상
2001년 서던이스트 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수상(엘렌 버스틴)
'영화리뷰 2000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멘토(2000) -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솟구치는 쾌감 (0) | 2022.12.22 |
---|---|
터미네이터 3(2003) - 2편 이후 12년 만에 "I'm back"을 외치며 돌아온 터미네이터 (0) | 2022.12.22 |
복수는 나의 것(2002)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처절한 복수극 (0) | 2022.12.21 |
스파이더 게임(2001) - 아주 엉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매우 치밀하지도 않는 어중간한 수사극 (0) | 2022.12.19 |
해운대(海雲臺)(2009) - 1,132만 명의 마음을 훔친 눈물과 감동의 쓰나미 (0) | 2022.12.17 |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