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용 중에 영화 <태양의 제국(1987)>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태양의 제국(1987)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풍자 작가, 에세이스트였던 J. G. 발라드 J. G. Ballard(1930~2009)가 1984년 발표한 같은 제목의 반(半)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테리 길리엄 Terry Gilliam의 <브라질 Brazil(1985)> 등의 각본을 쓴 체코 태생 영국 극작가이자 각본가 톰 스토퍼드 Tom Stoppard가 각색을 맡은 <태양의 제국 Empire of the Sun(1987)>은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가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1985)>에 이어 1980년대 워너 브라더스와 작업한 전쟁 영화입니다.
당시 13세 크리스천 베일 Christian Bale은 10세에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 배우 에이미 어빙 Amy Irving이 주연한 미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합작 TV영화 <아나스타샤: 애나의 미스터리 Anastasia: The Mystery of Anna(1986)>와 스웨덴, 소비에트 연방, 노르웨이 합작 영화 <머나먼 나라의 미오 Mio in the Land of Faraway(1987)> 등에서 작은 역할을 맡은 후, 에이미 어빙이 당시 남편이었던 스필버그에게 베일을 추천했고, 4,000대 1이 넘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태양의 제국(1987)>의 주인공 제이미 "짐" 그레이엄 역에 캐스팅되었습니다.
베일과 함께 존 말코비치 John Malkovich, 미란다 리처드슨 Miranda Richardson, 나이젤 하버스 Nigel Havers, 조 판톨리아노 Joe Pantoliano, 레슬리 필립스 Leslie Phillips 등이 출연했고, 당시 갓 데뷔한 20대 초반 신인이었던 벤 스틸러 Ben Stiller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베일과 존 말코비치는 <태양의 제국(1987)> 이후 제인 캠피언 Jane Campion 감독의 <여인의 초상 The Portrait of a Lady(1996)>에도 함께 출연했습니다.
2,500만 달러(약 323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영국의 엘스트리 스튜디오를 비롯, 상하이와 스페인 등지에서 16주간 촬영한 <태양의 제국(1987)>은 1987년 12월 11일, 워너 브라더스 배급으로 북미에서 리미티드 릴리즈로 선개봉 후,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확대 개봉해, 북미 최종 수익 2,224만 달러(약 288억 원), 전 세계 최종 누적 수익 6,670만 달러(약 864억 원)를 기록, 제작비 규모 대비 수익을 남기기는 했지만 스필버그 연출 영화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뒀습니다.
1988년 6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 편집상, 미술상, 의상 디자인상, 오리지널 스코어상, 사운드상 등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고, 영국에서는 다음 해인 1988년 3월 개봉, 1989년 42회 영국 아카데미 BAFTA에서 촬영상, 사운드 디자인상, 스코어상 등 3개 부문 수상작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북미 개봉 후 1년 반쯤 지난 1989년 7월 8일, 뒤늦게 개봉했지만 서울 관객수 18만 명으로 역시 스필버그 영화치고는 크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제2차 세계대전 말엽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던 때,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자국 방식의 행정과 무역 등 경제활동은 물론 자국민들도 고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거주하던 상하이 공공 조계에서 영국 상위 중산층 집안의 자제인 제이미 "짐" 그레이엄(크리스천 베일)은 특권층의 삶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군은 상하이 공공 조계에까지 침투했고, 영국 거주민들은 거주 지역을 벗어나 상하이를 떠나기 시작하고, 북새통 가운데 제이미는 부모와 헤어지게 됩니다. 집에 가서 기다리면 데리러 가겠다는 어머니 메리(에밀리 리처드)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제이미는 다시 살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제이미의 부모는 돌아올 기미도 없고, 시중을 들던 중국인들은 값나가는 가구들을 밖으로 실어 나르고, 큰 집에 홀로 남은 제이미는 남은 음식들을 먹으며 부모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다 먹을거리도 떨어지고 수도도 끊겨 물 한 모금 마실 수조차 없게 되자, 제이미는 도시 곳곳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굶주림에 지친 제이미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일본군 무리에게 다가가 항복하겠다고 영어로 외치지만, 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군들은 콧방귀를 뀌며 제이미를 무시합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추방된 사기꾼 베이시(존 말코비치)와 프랭크(조 판톨리아노)가 제이미를 발견하고 자신들의 거처로 데려갑니다. 하지만 제이미를 팔아넘기기가 어려워지자, 둘은 곧 제이미를 거리에 내몰 작정이었지만, 이를 눈치챈 제이미가 자신이 살던 동네로 가 빈집털이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부모가 돌아왔을 거라 기대하며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간 제이미는 일본군이 점령한 꼴을 보고 기겁합니다. 곧, 제이미와 베이시, 프랭크는 포로로 잡혀 민간인 집결소로 보내지고, 이후 쑤저우 수용소로 이감됩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즈음.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살 떨리는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제이미는 수용소 사령관인 나가타 상사(이부 마사토)까지 포함된 물품 교환 네트워크를 한껏 발휘하며 수용소에서의 삶을 이어가고, 영국인 의사 롤린스 박사(나이젤 하버스)가 수용소 안에서 제이미의 보호자 역할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에 대한 불편한 마음
영화 <태양의 제국(1987)>를 처음 본 이후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늘 기억에 남았던 두 가지는, 엔딩 장면에서 특히 강렬했던 크리스천 베일의 눈빛과 웨일스 자장가 '수오 강 Suo Gân'의 멜로디였습니다. 스필버그의 최고작이라고 꼽기에는 상당히 주저되지만, 훗날 명배우로 성장한 크리스천 베일의 어린 시절 연기가 놀라웠다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워낙 어릴 때 처음 봐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태양의 제국(1987)>은 어찌 보면 참 이상한 시각으로 점철된 전쟁 영화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30여 년이 훌쩍 지나, 어느새 50대를 앞둔 크리스천 베일의 비범한 연기는 여전히 감탄스러웠고, '수오 강'의 멜로디도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일본군-일본을 바라보는 영국인의 시선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샘솟았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영국식 생활 방식과 수준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부유층 자제인 제이미가 비행기에 대해 가지는 관심, 좀 지나치게 보자면 집착은, 또래 어린이로서뿐 아니라 나이를 떠나서 그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일본군의 행위에 대한 올바른 비판 의식은 서랍 속에 집어넣고,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아름다운 오리지널 스코어가 결합해 낭만적인 서사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데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을 말살하는 극악무도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류층의 안락한 울타리에서 내쫓겨 수용소에서 거칠게 생존하는 영국 어린이를 통해 스필버그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었을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이쯤 되면, 오히려 <태양의 제국(1987)>이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으로까지 추앙받지 않는 현실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영화 정보]
국내 제목: 태양의 제국(1987)
원제: Empire of the Sun
제작국가: 미국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캐스트: 크리스천 베일, 존 말코비치, 미란다 리처드슨, 나이젤 하버스, 조 판톨리아노, 레슬리 필립스, 로버트 스티븐스, 폴 맥간, 데이비드 네이도프, 랄프 시모어, 벤 스틸러, 이부 마사토 등
장르: 전쟁/드라마
러닝타임: 154분
관람등급: 15세 관람가
개봉일: 1989년 7월 8일(한국)/1987년 12월 11일(미국)
주요 수상내역:
1988년 60회 아카데미 6개 부문 노미네이트 - 촬영상, 편집상, 미술상, 의상 디자인상, 오리지널 스코어상, 사운드상
1989년 42회 영국 아카데미 BAFTA 3개 부문 수상 - 촬영상, 사운드 디자인상, 스코어상
1988년 45회 골든 글로브 어워즈 2개 부문 노미네이트 - 작품상(드라마), 오리지널 스코어상
1988년 40회 미국 감독조합 DGA어워즈 감독상 노미네이트
1987년 2회 미국 촬영감독협회 ASC어워즈 극장 개봉영화 촬영상 수상
1988년 59회 내셔널 보드 오브 리뷰 어워즈 4개 부문 수상 - 작품상, 감독상, Top 10 영화, 청소년 연기 특별상(크리스천 베일)
1987년 7회 캔자스 시티 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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